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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내용

북한군의 남침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웅진반도에서 시작된 전쟁은 곧 38선을 연하여 동쪽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북한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한군을 격파하며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등 신속하게 전세를 장악했다.

유엔군 참전

미국은 6월 26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하였다.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조치를 추후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인천상륙작전

한달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리게되자 연합군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로 인천상륙작전으로 9월 15일 서울에 진입하게 된다. 서울을 완전히 회복한 뒤에는 38도선을 지나 원산, 평양까지 탈환하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중공군의 개입

유엔군의 공세가 가속화되자 중공군이 개입하게 되어 전세는 다시 역전이 되고 장기화활 조짐이 나타났다.

1.4후퇴

중공군의 원조에 힘입은 북한군은 다시 38선을 넘어 남진하였다.
이때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정전제의와 휴전회담

유엔주재 소련대사 말리크가 유엔연설을 통해 1951년 6월 23일 휴전을 제의하였다. 종전을 원하던 중공과 북한은 휴전을 지지의사를 표명하였고, 미국도 긍정적인 입장을 밝힘으로써 7월 개성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다.
이후 정전협상이 체결될때까지 38선 부근에서는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판문점 접촉

유엔군사령관은 양측전선 중간지점에서 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하면서 판문점이 새로운 회담장소로 결정되었다. 미국의 실질적인 의도는 적을 유엔군 관할지상에 끌어들임으로써 발언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이것은 개성을 잃게 된 원인이 되었다.

휴전협정 서명
(1953.7.27)

전쟁 당사자인 한국을 제외하고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공군은 전문과 5조 60항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하였다. 이로써 3년 1개월 동안 지리하게 이어졌던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로 남과 북이 대치되어 있다.